일본이야기 2007.12.27 19:46

舊 일본군을 패망시킨 장본인 SG RADAR 

레이더는 역사 깊은 기술이다. 레이더 발명의 기원은 1880년대 후반에 독일의 물리학자 Heinrich Hertz에 의해 수행된 전자파 방사에 관한 실험에서부터였다. 1888년에 Hertz는 파장이 66㎝ 정도 되는(대략 455MHz) 무선파를 사용하여 이들 무선파가 광파(빛)와 동일하게 금속성 물체에서는 반사되고 유전체에서는 굴절되는 특성을 갖고 있음을 실험적으로 입증해 보였다. 1922년 무선파를 이용한 레이더의 효과에 관한 실험이 Washington, DC에 위치한 미 해군 연구소(NRL)에서 실시되었다. 연구원들은 실험을 위해 Potomac 강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무선 송신기를, 반대편에는 수신기를 설치하여 송신기와 수신기 사이를 배가 통과할 때마다 수신 신호상에 파동(fluctuation) 현상이 발생함을 알게 되었다. 1930년에 L. A. Hyland는 항공기가 송신 안테나의 빔을 관통하여 비행할 때 수신 신호에서 파동 현상이 발생된다는 사실을 관측함으로써, 레이더의 기본 원리는 미 해군 연구소에서 재발견되었다. Hyland와 그의 동료 연구원들이 무선파를 이용하여 표적을 탐지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정열적으로 열심히 연구를 하였지만, 해군 고위 관계자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30년대에 전세계적으로 정치적 불안이 고조됨에 따라, 몇몇 국가들은 무선 반향신호(echoes)를 이용하여 항공기를 탐지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였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구 소련, 이탈리아, 일본은 모두 독자적으로 수년내에 레이더를 개발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였다. 이들 국가의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초기인 1939년에 군사 목적에 사용될 레이더를 실용화시켰다. 미 육군이 개발한 최초의 레이더는 대공포 통제용 SCR-268과 항공기 탐지용 SCR-270 레이더이었고, 이 두 종류의 레이더는 제2차 세계대전 초에 실전 배치되었다. 1941년 12월 7일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하기 위해 접근중인 일본 전투기들을 탐지하였던 레이더가 바로 SCR-270 이었으며, 그 당시 하와이에 실전 배치되었던 6대의 레이더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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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레이더는 SC "Sugar Charley" 와 SG "Sugar George"라고 불리우는 레이더 시리즈로 구성되었다. 이중에서 SC "Sugar Charley"는 항공기를 탐지하는 레이더인데 80해리의 범위내에서 1000피트 상공의 적 항공기를 탐지 해 내는 능력을 가진 레이더였다. 높이4피트, 길이 15피트짜리 크기의 다이폴을 수평으로 쭈욱 배열하여 만든 안테나의 형상을 가졌다. 이 레이더를 개선한 레이더가 나왔는데, 그것은 2피트짜리 다이폴이 10개인 레이더로 탐색레이더로 활용되었다. 이것은 1.75피트짜리 5개의 파라볼릭 리플렉터(parabolic reflector)를 사용하여 대 지상 탐지거리는 20 노티컬 마일이고 대 항공기 탐지거리는 15 노티컬 마일이며, 고도는 500피트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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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미국은 당시에 신형 레이더인 SG "Sugar George"라고 불리우는 SG레이더(Radar)를 개발하였는데, 이것은 일본 전파탐신기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단순한 탐지기능외에 정밀 사격통제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은 현대식 레이더와 비슷한 것으로 레이더 스크린에는 함포사격시에 가장 중요한 정보인 "탄착점"을 파악 할 수 있었고 이를 스크린에 표시하여 재장전시의 참고자료로 사용 할 수 있게 하였다. 즉, 포탄이 표적물 근처에 떨어질 때 생기는 물기둥(Splash)이 레이더 화면에 포착되기 때문에 장거리에서 빠른 시간에 정확한 탄착점을 형성할 수가 있었다. 아래와 같은  레이더 스크린이 보여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레이더에서 탐지된 정보는 사격통제관에게 전달되어 광학기계를 이용하여 관측된 정보와 조합하여 함포의 통제관에게 거의 정확한 탄착거리와 목표물의 속도 및 이동 경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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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 RADAR
Peak Power: 50 kW  
Pulse Repetition Frequency: 775  
Accuracy: 200 yds, 2°  
Resolution: 400 yds, 2-3°  
Weight: 3000 lbs  
Ranges: 전함 22nm, 구축함 15nm, 폭격기 500ft의 고도로 탐지거리는 15nm.

출처: 본인의 이글루 http://weapon.egloos.com/1638007

posted by 지나가다가
일본이야기 2007.12.27 19:28

舊 日本軍에게 궤멸을 안겨다 준 야기안테나..


●태평양전쟁의 흐름을 바꿔놓은 야기 안테나의 역사.
안테나는 "곤충의 촉각"이란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다. 안테나는 송신기에서 오는 전력을 전파 에너지로 바꾸어 공간에 방사한다. 반대로 수신 때에는 공간을 통하여 오는 전파에너지를 흡수하여 전력으로 바꾸고 그것을 수신기에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안테나는 일종의 에너지 변환 장치라고 할 수가 있다. 안테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영국의 맥스웰이란 사람이 자유공간에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전파의 존재를 예언한 뒤 독일의 헤르츠가 1887년에 실제로 전파를 발생시켜 안테나를 통하여 공간에 발사한 것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현재는 많은 안테나가 개발되어 항공기와, 차량, 선박, 위성, 미사일, 전파 망원경 등 여러 가지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야기 안테나 또는 야기 우다 안테나로 불리는 "야기 안테나"는 발명가의 이름을 따서 "야기 안테나"라고 부른다. 야기는 일본 다이조시대 말기에 센다이 시에 있던 도호쿠 대학의 교수이고 우다는 그 대학의 전임 강사였다. 나중에는 둘 다 그 대학의 명예 교수가 되었다. "야기 안테나"는 1926년에 발명되었는데 정작 일본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러다 1941년 겨울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1941년 봄 일본군이 영국군이 사용하던 레이더를 한 개 노획하였다. 그리고 뉴만이라는 레이더기사의 노트도 발견하였다. 이 노트에는 모든 곳에 YAGI ARRAY(야기 배열)이란 문자가 적혀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YAGI ARRAY라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포로 수용소에 있는 뉴만이라는 기사를 데리고 와서 YAGI 라는 단어의 뜻에 관해 심문하였다. 레이더기사는 파란 눈을 껌뻑거리며 야기는 당신 나라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일본군과 과학자와 공학자들이 전부 놀란 건 당연지사. 야기 안테나가 발명된 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일본에서는 두 번 사용되었다. 한번은 야마가다 현에 있는 사가다 앞 바다에서 40Km 떨어져 있는 도비시바섬 사이의 라디오 회로에 사용되었고, 또 한번은 니이가다 앞 바다에서 50Km 떨어져 있는 사또섬 사이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안테나는 일본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 안테나를 레이더와 비행기의 계기 착륙등에 응용하는 등 착실히 개발을 착수하였다. 지금도 워싱턴에 있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가면 히로시마와 나가 사키에 투하되었던 원자 폭탄의 폭발점 높이를 결정하는 장치로 야기 안테나가 장착되어있다. 정작 "야기 안테나"를 발명한 일본은 제대로 활용을 못하고 전쟁 상대국에서 무기로 개발하여 일본에 많은 타격을 주고 결국 일본이 패망하게 된 것은 역사적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야기 안테나의 소개
「야기 안테나」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초단파용 지향성 안테나를 소개한다. 「 야기(八木) 안테나」는 구조가 간단하고 초단파(超短波) 전파에 대하여 뛰어난 지향성(指向性) 특성을 가진 안테나로서,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인 1925년에 八木秀次라는 사람이 발명한 것으로 일본 특허청에서 특허 제69115호로 특허 받은 것으로서, 이 발명(안테나)은 도체(導體)의 길이가 ½파장(波長) 이상인 때는 전파를 반사하고 ½파장 이하인 때는 전파를 전달한다는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주(主)안테나의 뒤쪽에는 ½파장 보다 긴 반사용 안테나를 설치하고 주안테나의 앞 쪽에는 ½파장 보다 짧은 전달용 안테나를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안테나가 발명되었던 당시에는 초단파 이용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가를 받지 못 하였다. 그 후 세계 제2차대전(1939-45년)이 발발하면서 미국이 이 기술을 군사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전파병기(電波兵器)의 하나인 레이더는 공중전과 해전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해군이 미군에게 참패 당하게 된 배경에는 전파병기 기술이 큰 요인 중의 하나였는데 일본인(야기-우다)의 발명에 의해 그들의 조국 일본이 궤멸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종전(終戰) 후인 1951년에 발명자인 八木秀次씨는 그 공로를 인정 받아 표창을 받았는데, 그것은 이 발명이 특허를 받은지 26년이 지난 뒤였다. 이 발명은 발명 당시에는 사회적인 기술수준이 부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평가 받지 못하였다고 하나, 그 후 전파(電波) 기술의 발달과 TV의 보급에 따라 지금은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기술의 하나가 되었으며 우리 생활에서도 밀접하게 이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발명은 발명자가 특허를 받음으로써 사회로부터 충분한 보상을 받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 기술이 세상에 공개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이용·발전시켜 인류의 자산인 과학기술을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는 점에서 특허제도의 필요성을 대변해 주는 발명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현대에도 야기 안테나는 널리 쓰이고 있는데 가정의 주택이나 아파트 옥상에 잠자리처럼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TV수신안테나가 바로 그것이다. 야기 안테나는 일본의 야기씨와 우다씨가 개발하였고, 그중 우다씨는 이미 타계하였다고 한다. 야기 안테나의 생김으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옥상의 TV 안테나가 바로 그 안테나로서 이 안테나는 엘레멘트(도파기:파이프막대)의 수에 따라 지향성의 폭이 결정되는데, 우리는 TV의 안테나가 바람을 타고 약간만 방향이 틀어져도 화면이 찌그러지거나 흔들리는 것을 경험해 보았다. 이 야기 안테나의 구성을 살펴보면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는 데, 전파가 원하지 않는 역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반사기(Reflector)와 전파를 발사하는 급전부(Radiator) 그리고 발사된 전파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내는 도파기(Element)등으로 나뉘어 진다. 따라서 "도파기의 수가 얼마나 되나" 에 따라 지향성은 각도가 결정되고, 도파기를 많이 붙일수록 전파를 한 곳으로 모아 집중적으로 발사하거나 상대국에서 발사한 전파를 끌어 모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아마추어 무선사가 어느 특정한 방향으로만 밀집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안테나 설치를 위하여서 타워(Tower)와 안테나의 방향을 이리 저리 돌릴 수 있는 로테이터(Roteitor)를 필수적으로 부착해야 하는 등 많은 재정이 들어가는 것이 큰 부담이라 하겠다.

일본은 2명의 일본인에 의한 발명으로 결정타를 얻어 맞게 되어 미국에게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되었다. 그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한 장본인은 도호쿠 대학의 교수인 야기와 강사인 우다.. 야기 안테나를 응용하여 그 유명한 항공기 탐지용 레이더인 SC RADAR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이 때문에 사실상의 궤멸을 가져다 준 안테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출처: http://weapon.egloos.com/1631531

posted by 지나가다가
일본이야기 2007.12.07 10:53

○舊일본전차들의 장갑이 형편없었던 이유는?○    

일본군은 프랑스의 르노 경전차를 받아들이면서 전차라는 무기의 개념도 함께 정립하게 되는데, 그들의 전차라는 무기의 운용개념은 보병-전차간의 유기적 활용을 근간으로 하며, 이를 응용시킨 전술을 채택하게 이른다. 그것은 다름아닌 '보전 협동 전술'. '보전 협동 전술'이란 "보병-전차間 협동 전술"이란 뜻이다. '보전 협동 전술'의 채택으로 인해 일본 전차들은 태생적으로 "전차와 전차간의 전차전을 위한 전차"가 아닌 "보병의 전투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전차"로 탄생되게 되었다.  따라서 독일, 소련等과 같이 전차전을 기대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 할 수 밖에 없었다. '보전 협동 전술'의 보병 지원용 전차들이다 보니까 보병의 이동속도와 알맞게 최적의 속도(30 ~ 40km대)를 내도록 한  전투차량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 전차들은 보병들이 전투를 펼칠 때 근접해서 지원 화력을 뿜어 상대를 압도하는 것이 임무이다. 따라서 전차전을 위한 전차들과 1:1로 맞대결을 펼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며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최악의 상황인 것이다. 게다가 '보전 협동 전술'에 입각한 전차들이다 보니까 장갑이 그다지 두껍지 않아도 되었으며, 다만 적 보병의 총탄을 막아낼 수 있을정도 수준의 장갑이면 되었다.(사실, 적 보병(미군)들이 쏜 총탄세례에 멈춰선 전차들이 한두대가 아니었으니 적 보병의 총탄을 막아낼 정도 수준의 장갑이라고 한것이 의심이 가는 면이 다분히 있다.) 때문에, 장갑의 두께가 형편없이 얇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외에 다른 이유도 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당시 철강 수급의 문제에 봉착하여 식민지 국가들에게 철이란 철은 모두 압수하여 동원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조선, 대만, 중국 등지에서 징발, 차출된 철이 대부분이었다. 조선, 대만 등지에서 징발 된 철제류는 프라이 팬, 밥솥, 쟁기 등으로 사용되던 가정용 철제류 도구 等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동원된 가정용 철제류 도구 等은 일본 군수산업(항공기,전차,함정)물자를 조달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가정용 철제류 도구 等이 강철이 아닌 연철 수준이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이런 연철 수준의 가정용 철제류 도구 等을 다시 강철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시 녹여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제철-제강-압연-단조 과정을 거쳐 강철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일본의 자체적인 제강-압연-단조 과정의 기술력은 구미 선진제국(미국,영국)과 동맹국인 독일에 비해서도 뒤떨어지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탄성강도가 높은 강철을 생산 해 내기란 역 부족인 상황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어중간 탄성의 철로 전차의 차체와 장갑을 만들고, 함정의 갑판과 장갑을 만들고, 항공기의 동체와 날개를 만들어 조달하였던 것이다. 결과는 보나마나 뻔한 결과로 소위 장갑이란 것들이 맷집이란 것을 모른채, 구멍이 숭숭~ 뚫려버리는 결과를 초래 했던 것이었다. 이런 어리숙한 제강-압연-단조의 기술과 가정용 철제류의 동원等이 일본 전차 장갑이 계적으로 악평을 떨칠 수 있었던 것에 크나 큰 기여를 한 것이다.

posted by 지나가다가